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사의 난 (문단 편집) === 대내적인 영향 === 안사의 난이 당나라 내에 미친 가장 핵심적인 영향은 율령제의 파괴와 지방통제력의 약화다. 율령제가 무너지자 순차적으로 당의 재정도 매우 빈약해졌다. [[균전제]], [[부병제]], [[조용조]]라는 제도적 뒷받침을 받는 율령제는 그 세 가지가 모두 무너져 내리면서 형식적인 것으로 전략했고, 급격한 인구 감소와 기존의 토지대장 및 호적부의 손실에 이어 절도사들의 득세가 이어지면서 이들이 사실상 독립정부를 꾸리다시피 한데다가 상술한 내란으로 재정이 빈곤해진 것까지 겹쳐서 당나라의 재정은 매우 위태로운 상태였다. 당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조용조대신 [[양세법]]을 도입하고 소금 전매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이는 백성들을 어떻게든 더 짜내서 부족한 재정을 회복시키자는 방침인지라 백성들의 반발이 심했고, 이는 이후 당이 망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거기에 자충수에 가깝더라도 완화의 여지라도 있었던 자금사정과 달리 '''지방통제력의 약화'''는 당에게 매우 치명적이었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전, '천보 10절도사'라 칭해지던 10명의 [[절도사]]들은 강력한 군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권에 비하면 그 통치영역이 매우 협소한 편이었다. 당장 4개 절수를 동시에 역임하고 27만명이라는 대군의 통솔권을 가짐으로서 당나라 역사상 장수로서는 [[곽자의]]와 비견될 정도로 군권을 휘둘렀던 [[왕충사]]가 직접적으로 통치 가능하던 주가 15개밖에 안 됐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절도사 하나당 평균 3~4개가량의 주만 관리할 수 있었던 셈. 그에 비해 안사의 대란 이후 득세한 내지번진은 지방의 통솔력이 매우 컸다. 덩치가 큰 번진의 경우, 아예 번진 하나가 7, 8개 주를 지배한 것은 예사요. 평로치청번진, 노룡번진, 산남동도번진처럼 10개 이상의 주를 지배한 사실상 독립국가에 가까운 거대 번진도 다수 실재했다. 내지번진이 득세하며 조정은 수도 장안과 그 인근을 제외하면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이 즈음엔 내지번진에 의해 나라가 유지되는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이들은 상술했듯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의 조세와 호수를 조정에 신고하지 않고 자신들 선에서 통제하였으며 원화중흥 이전까지 당나라의 중앙정부에 조세와 호적을 바치지 않고 단지 명목상으로만 충성하면서 독립세력화한 절도사들의 지배영역은 당시 [[절도사#s-3.1.2|당나라 강역 전체의 절반]]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다가 중앙정부와 분진간의 대립은 이들 선에서 멈추지 않고 자연스레 외부 세력의 포섭까지 영향을 끼쳤고 당연히 그 외부 세력의 대표격이던 토번과 위구르를 포함한 다수의 이민족들이 중간과정에서 막대한 이득을 받았으며 발해와 신라 또한 이 당시에 당의 요청에 따라 대규모로 군대를 파견한 적이 있다 '원화중흥'을 이룩한 여러 재정개혁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세율을 통해 백성들을 쥐어짜고, 이를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강대한 금군을 편성한 것인데, 이런 식의 수탈이 일어난 이유 또한 번진의 난립으로, 절반밖에 남지 않은 영토에서 나머지 절반을 장악한 절도사들을 제압하고 외적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환관들의 군권 장악 또한 이때부터 이루어졌다.이보국, [[정원진]], 어조은 등 이 시기에 권세를 누린 [[환관]]들은 모두 군권과 군 인사권을 움켜쥐고 있었으며, 이때문에 황제도 이들을 함부로 제거하지 못했고, 심지어 상황이 된 당현종이 유폐된 상태로 죽어가는 것도 따지지 못했을 정도로 황권이 실추했다. [[당대종]]이 어조은을 숙청하는데 성공한 이후 금군의 지휘권을 회수했지만 이는 이미 전례가 되었으며, 장군들을 불신한 [[당헌종]]이 다시 환관에게 군권을 부여하면서 환관들의 천하가 시작된다. 이들은 중앙에서 각종 부정부패를 자행했으며, 안 그래도 고세율이었던 당 중후기의 조세정책은 부정부패와 가렴주구에 의해 심하게 망가져 그 부담은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결국 절도사들의 난립, 이들을 제압하기 위한 고세율과 소금 전매, 환관들의 전횡과 그로 인한 부정부패가 세트로 겹치면서 당을 멸망시키는 대반란, '''[[황소의 난]]'''이 일어난다. 다만 실제로 이 시기에 존재하는 당나라 견문록이라든가 여행기 같은 걸 보면 번진들이 난립하여 서로 치고받고 싸우거나, 그걸 제압하기 위해 고세율의 수취제도를 구축한다고 해서 무슨 생지옥이 펼쳐지거나 한 건 아닌 모양이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는 시기를 전후로 해서는 몰락한 민생과 그로 인한 농민봉기가 나타나지만, 번진 난립시기나 이를 평정한 원화중흥 초반에는 이런 일이 드물었으며, 그 이전의 번진 난립기에도 어느 정도 질서가 성립한 후에는 그럭저럭 살아갔던 듯 싶다.[* '혼란스럽기는 해도 의외로 살 만했던 분위기'는 5대10국시대까지도 쭉 이어지는데, 절도사들이 자기 나와바리를 지키려다 보니 생각보다 어느정도 사람 살 만하게 통치를 하긴 했던 측면도 있다. 황소의 난 때 황소가 여기저기 도망다니다 장안을 점령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인데, 절도사들이 잘 지키고 있는 동네보다 장안이 여러모로 점령하기도 훨씬 만만하고 통치자에 대해 인심도 사나웠었기 때문이다.] 한편, 문화적으로는 당나라가 왕조의 특징이었던 북방민족 특유의 국제성과 개방성을 상실해 가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전까지 당은 매우 개방적인 사회여서, 당현종 붕어시에 당에서 관리로 일하던 이민족들이 수백명에 달할 정도였고, 당현종이 장안에서 파천할 때 태자를 분조로 보내면서 '서북 사람들에게 잘 해 줬으니 그들을 힘으로 쓸 수 있을 것'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인종 차별이 적고 개방적인 사회였다. 그러나 반란이 지속되면서 이러한 개방성은 차츰 사라져 갔고, 문화적으로도 개방적이고 국제적이던 것이 차츰 폐쇄적으로 변해갔다. 처음에는 [[한유]], [[이고]] 등의 고문파들이 등장해 불교를 비판했고, 845년 당무종의 [[회창폐불]]로 상징되는 대대적인 불교 탄압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인해 교종 불교는 쇠퇴하고, 대신 선종 불교가 이 공백을 메우며 남송 시대 [[성리학]]의 완성 이전까지 중국 사상계를 이끌게 된다. 경교([[네스토리우스교]])도 마찬가지로, 원화중흥 이전에는 대진경교중국유행비가 세워지는 등 그 세가 강성해지기도 했으나, 845년에는 폐불정책 때 덤으로 같이 탄압당해 사실상 중국에서 소멸했다. 명교([[마니교]])와 현교([[조로아스터교]])도 불똥을 피하지 못했다. 그나마 상업은 쇠퇴하지 않고 [[북송]]으로 이어졌다. 황소의 난 당시 남쪽 광주에서 황소군에 의해 살해된 회회인(아랍인)의 수가 거의 10만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고. 그러나 이런 장거리 무역 또한 점차 약해지고 [[신라]]와 [[왜]] 등과의 근해 교역이 이를 대체하게 된다. 한국사에서 [[신라방]]과 [[청해진]]이 한참 전성기를 맞던 시기가 당과 신라의 전성기였던 8세기 초가 아닌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초까지였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발해도 내지는 [[엔닌]]의 중국 여행과 법화원의 건립과 같은 일이 이때에 일어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